(고창)유수한 인맥의 고장으로 의를 숭상하고 예술을 사랑해 온 곳

- 일시: 2023-6-3~4
- 날씨: 대체로 맑으며 더운 날
- 몇명: 홀로

 

오랫만에 주말에 날씨가 맑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몇년만에 중학교 동기들과 오랫만에 회포를 풀고 밤8시 즈음에 자리를 먼저 떠 바로 고창으로 향합니다.

 

고창은 국내 최대의 거석문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인맥의 고장, 의향의 고장이자 판소리의 성지이면서 민속의 보고입니다. 임진왜란, 동학 농민 혁명, 의병 창의, 3·1운동 시기 고창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구국 활동과 구국 인물 등을 보면 고창은 의향입니다.

 

실제 탐방을 해보니 고창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유수한 인맥의 고장이었고 의를 숭상하고 예술을 사랑해 온 고장이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 답사일정(風輪) :610km


동학농민혁명발상지-두암초당-전봉준 생가터(녹두장군전봉준전시장)-석탄정-고창읍성

 

2023-06-03

 

고창군의 공음면 구암리의 동학농민혁명발상지라는 곳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은 밤 12시 40분 정도 되었습니다.여기서 일박을 합니다.

 

2023-06-04

 

▷동학농민혁명발상지: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1118

 

전날 300여km를 운전해서 오다보니 피곤했었는지 평소보다 늦은 아침 7시에 눈을 뜹니다.

동학유적지는 어느 정도는 예측했지만 실제로 가보니 실제 남아있는 유적이 별로 없습니다.그나마 155억을 들여 고창동학농민혁명 성지화사업을 하고 있는데 2020년~2024년(5년)으로 되어 있고 내년이면 성지화사업이 끝난다고 합니다.무장기포 전망대와 역사관 건립이 주요 사업으로 보입니다.

 

동학농민혁명발상지는 고부이고 무장기포는 고부 봉기 후 전국적으로 혁명의 불길이 번져 갈 때 그 불길의 첫 번째 닿은 곳이라는 의미는 있습니다만 발상지라고 주장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측면도 있습니다.여하튼 동학농민혁명발상지라는 글씨가 표지석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무장기포지(高敞 茂長東學農民革命 起包地)라고 하는 것이 맞겠죠.

비석이 있어서 살펴보니 갑오동학농민군 고창주의장추모비라고 씌여있습니다.고창주 의장은 15세 아들과 함께 동학농민군에 참여해 황토현 전투,황룡촌 전투,전주성 전투에 참전했으며 농민군 지도부와 함께 체포 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 났으나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체포되어 지방 관원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세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전봉준(중앙),손화중(우),김개남(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기포지(高敞 茂長東學農民革命 起包地)는 1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입니다.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관군의 소탕을 피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 함께 손을 잡고 농민들을 모아 훈련을 시킨 장소이며 봉기 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뫼"인데 당뫼는 얼핏 보아도 당산나무가 있는 산으로 읽힙니다.

당산나무인 키 큰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만 기념식수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동학농민군훈련장 옆으로 깃발들이 꽂혀져 있습니다.


안내판의 동학농민군의 진격로를 보니 기포지-무장현 관아-전봉준 생가-고부관아로 이어집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무장포고문 등)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축하 현수막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무장현관아: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길 45

 

동학농민군 진격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음을 느낍니다만 먼저 두암초당으로 가기 위해 그냥 패스합니다.

두암초당(斗巖草堂):전북 고창군 아산면 영모정길 45

 

두암초당 근처에 오니 깍아지른 절벽면에 붙어 클라이밍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두암초당은 호암 변성온과 인천 변성진 형제가 만년에 머물렀던 곳으로 하서 김인후에게 가르침을 받고 퇴계 이황과 교류한 호암의 인품이 곡식을 되는 말(斗)이나, 저울 추같이 평평하여 치우치지 않았다고 하여 '두암'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시를 지는 분이니 대체로 풍류지향적인 느낌이 관통됩니다.

두암초당은 부모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변성온,변성진 형재의 효성을 기억하려고 후손들이 지은 정자로 나온 것으로 볼 때 앞뒤가 안맞는 설명도 느껴집니다.일반적인 한국의 정자와는 다른 위치에 지어져 있어서 뭔가 느낌이 색다릅니다.두암초당은 전좌바위를 조금 파서 그 안에 구조물을 끼워서 지은 정자입니다.지난주 경주 골굴사에서 본 타포니 구조와 같은 이치로 움푹 파인 곳이 보입니다.


이곳은 김소희 명창이 득음한 곳이라고 합니다.변성온의 호가 호암인데 호암은 병바위를 의미합니다.병바위(壺岩)는 말 그대로 병 모양새를 닮았고 신선이 마시던 술병이 거꾸로 꽂혀 병바위랍니다.이웃에 호암(壺岩) 마을이 있습니다.

 

두암초당을 향해 인사하는 듯한 한그루의 나무도 보기 좋습니다.

무논에 비친 아산초등학교와 두암초당입니다.

입구를 막아놓아 들어가지는 못하고 건물을 올려다보니 두암초당과 산고수장(山高水長) 현판이 보입니다.산고수장은 산이 높고 물이 길다는 의미이지만 君子(군자)나 어진 사람의 (덕)이 後世(후세)에 길이길이 전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人品(인품)이 높고 節操(절조)가 있다는 의미입니다.고창만의 독특함의 밑바탕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不覺春風入小桃  불각춘풍입소도
淸晨植杖立東皐  청신식장입동고
尊中有酒堪傳白  존중유주감전백
紙上無詩可和陶  지상무시가화도

어느덧 봄바람이 복사꽃에 드니
맑은 새벽 지팡이 집고 물가에 서보네
술동이엔 이백에게 전할 술이 있으나 

종이엔 도연명을 화답할 시가 없어라

-하서 김인후의 시  

역시 하서 김인후답다는 느낌이 드는 시입니다.

........

 

호남의 변성온(邊成溫 1540-1614) 수재가 찾아와서 여러 날을 머물다 떠나기에 시를 지어 이별하며(湖南邊成溫秀才來訪 留數日而去 贈別/호남변성온수재래방 유수일이거 증별)

風雪尋師十載前(풍설심사십재전) 눈보라 속 스승을 열 해 전에 찾아왔다
云何一辯嘆靡傳(운하일변탄미전) 일판향을 갖고 어찌 못 드린 걸 탄식하랴?
勸君莫被因循誤(권군막피인순오) 권하노니 잘못된 일 따라감을 받지 말고
勞力須撑上水船(노력수탱상수선) 물 거슬러 가는 배를 애써서 꼭 지탱하게.

 

- 퇴계 이황의 시


[* 일판향(一瓣香)~일주향(一炷香)과 같은 말로서 스승의 연원을 계승하는 것.불교 선종에서 장로가 법당을 열고 도를 강할 때에 향을 피워 제삼주향(第三炷香)에 이르면 장로가 " 이 일판향을 나에게 도법을 전수해 주신 아무 법사에게 삼가 바칩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인용한 것. 혹은 화판(花瓣) 모양의 향으로 존경하는 어른을 흠양할 때 사용합니다.]


계속 정진하라고 퇴계가 독려하는 느낌이 듭니다.


(필사)

 

 

▷정봉준장군 생가터:전북 고창군 고창읍 당촌길 37

 

녹두장군전봉준전시장은 내부수리 중으로 잠겨있고 전봉준장군 생가터 표지석과 새야새야 파랑새와 노래비가 보입니다.

 

조수미는  고창군에 전해 내려오는 오리지널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새야새야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고 가사도 다릅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안지 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마라

아래녁 새는 아래로 가고 위녁 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마라 우리 밭에 앉지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 발톱 다 닳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마라

위여-----위여-----위여--위여-----

새야 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마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 새야

윗 논에는 차나락 심고 아랫 논에 메나락 심어

울 오래비 장가갈 때 찰떡 치고 매떡 치면

내가 왜다가 먹느냐 네가 왜다 까먹느냐

위여---위여----위여--위여-- 위여위여----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논에 앉지마라

 

(노랫말의 파랑새는 푸른색 군복을 입은 일본군을 의미하고, 녹두밭은 전봉준 또는 동학농민군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고 알려졌다. 처음에는 동요로 아이들 간에 불렸지만, 일제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 민족의 설움을 담은 민요로 자리매김하였다.)

 



https://youtu.be/YcCZbXTkS98

 

노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전주고부 녹두새야 /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 하절인줄 알았더니 / 백설이 펄펄 / 엄동설한 되었구나

 

일반 백성들의 심정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 잘 담겨 있습니다.

정작 전봉준 본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殞命(운명) 죽음 / 全琫準(전봉준 1854~1895)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를 만나서는 세상 모두가 힘을 합쳤으되

運去英雄不自謀(운거영웅부자모)

운이 다하니 영웅인들 어쩔 도리가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사랑과 정의뿐인 내게 허물이 없건만

愛國丹心誰有知(애국단심수유지)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아줄까

 

 

전봉준(全琫準, 1855년 1월 10일 ~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동학 농민 혁명 당시의 남접의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입니다.

 

 

여기서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무장포고문 등)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축하 현수막이 보입니다.

 

석탄정/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천길 174

여기도 한창 내부 작업 중입니다.포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어서 보호수 만큼 둥치가 큰 나무 아래 석판으로 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녹차 한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합니다.  

 

석탄정은 고창에 있는 석탄(石灘) 유운(柳澐1548-1611)이 지은 정자입니다.조선 선조 때 유운은 낙향 후 학문 강론을 위해 건립한 정자로 건축물의 구조가 타 지역에 존재하는 정자와는 다른 독특함을 가지고 있어서 건축연구의 가치가 높다고 들었는데 안으로 들어가질 못해 아쉬웠습니다.

석탄정石灘亭의 이름 의미는 "돌(石)과 여울(灘)이 있는 정자"라는 의미이며 류운 선생의 호가 석탄입니다.

저는 이번에도 보지 못한 석탄정의 한시입니다.

<석탄정(石灘亭)에서 >

송병순(宋秉珣 1839 헌종5-1912)

登斯最是怡神景(등사최시이신경) 여길 올라 맘 편케 한 풍광들이 제일이라
花木多陰畵洞天(화목다음화동천) 꽃과 나무 그늘 짙어 신선 세계 그려내고
石勢盤空平作嶼(석세반공평작서) 바위 형세 하늘 서려 평진데도 섬 이루어
水聲搖檻坐如船(수성요람좌여선) 물소리가 흔든 난간 배 안 인 듯 앉아있네.

(필사)

 

 

▷고창읍성: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5-9

 

입구에 판소리 박물관이 있으며 판소리를 중흥시킨 신재효에 대한 설명이 많습니다.근처에 동리 신재효선생추념비도 있습니다.

 

고창읍성 입장권은 3,000원인데 동일한 금액의 지역상품권을 줍니다.이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겠습니다.주차장 근처 로컬푸드 판매장이 있어서 여기서 저는 지역상품권에 현금을 보태어 블루베리 제품을 구입하며 사용했습니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의 방장산(方丈山, 743m)을 둘러싸고 있으며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시대 때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라 불렸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굴곡지고 리드미컬하게 오르내리는 성벽둘레를 따라 걷는 답성놀이를  TV를 통해  본적이 있습니다. 

입구는 공북루 누각이 있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 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 "
는 전설이 있다고.... 

 

 

작청은 관아의 아전들이 일하던 공간이라고 합니다.

모양지관은 객사입니다.

성벽 둘레를 도는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만 더위 때문에 저는 그늘로 다닙니다. 소나무 군락이 압권입니다.

고창읍성의 동문입니다.

 

▷고창 오거리 당산(중거리 할아버지당)

고창 오거리 당산은 1800년경 전라도 일대에 홍수와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자 세운 비보(碑補) 당산이라고 합니다.

글씨는 "천년완골홀연진남 진서화표 가경팔년계해삼월일千年頑骨屹然鎭南 鎭西華表 嘉慶八年癸亥三月日"로 천년 세월 꼿꼿하게 서서 고창의 터를 평안하게 해주기를 소망하며 1803년 3월에 세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고창은 중요민속자료도 무심하게 곳곳에 서 있습니다.

날이 점점 더워져서 탐방하기 쉽지 않은 시절이 너무 빨리 다가 온 느낌입니다. 


고창은 사람으로 치면 "르네상스맨Renaissance ma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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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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